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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1703-1791) 본문

신앙이야기

요한 웨슬레(1703-1791)

綠香 2013. 10. 24. 06:01

 

요한 웨슬레의 구원 간증(펌)


요한 웨슬레는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성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때 에그 자신은 모태신앙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러 미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에도 그리고 그 곳에서 2년여의 선교사역을 마쳤을 때에도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그 자신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에 그는 모라비안 형제교회 형제들을 통하여 ‘구원받는 믿음’에 관한 복음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믿음’에 관한 이 복음을 자신이 직접 사형수 에게 전하고 그 사형수가 믿고 구원받는 모습을 직접 경험할 때까지도 그는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일련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 이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죠지 휘트필드와 함께 하나님께서 영국에서 18세기의 대부흥 곧 제 1차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실 때 크게 쓰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그의 구원에 대한 간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즉 ‘구원받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에 대해 요한 웨슬레와 같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종이 겪은 구원에 관한 잘못 가르침과 오해와 이를 통해 겪는 어려움과 경험을 살펴보게 됨으로 동일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유익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1703년 6월 17일에 잉글랜드의 웹워쓰(Webworth)에서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와 어머니 수잔나 웨슬레 사이에서 19명의 아이들 가운데 15번째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아버지는 전도자였고,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현숙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요한 웨슬레 역시 이러한 경건한 부모 밑에서 그리고 종교적인 분위기 가운데 자라났습니다.

그는 소년시절에서부터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기만 하면 구원 얻는 줄 알았고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도 빠지지 않았으며 기도생활을 열심히 잘 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서 자신이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청년이 되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매일 한두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썼으며, 매주 성찬식에 참여했고, 속사람을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신이 "남보다 더 경건생활에 충실하고 극히 선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던 근거에는 자신의 선한 생활이 있었을 뿐 정작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근거 안에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자 요한 웨슬레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명문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도소를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금식에 힘쓰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는 일에 힘썼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선행들과 많은 의로운 행위들이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의 선행과 노력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요한 웨슬레는 선교사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전도하고 아메리칸 인디안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대서양을 건너면서 그 지루한 항해 중에도 자기의 종교생활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비록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을망정 그는 정작 거듭난 경험을 하지 못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목사는 되었으나 정작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동생 찰스 웨슬레도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로 자처하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항해 도중 배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여러 번 좌초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 웨슬레는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배를 탄 손님들 가운데에는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이란 진젠돌프 백작을 중심으로 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로 알려진 무리였습니다.

함께 배를 탄 모라비안 형제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는 사실을 웨슬레는 직접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평강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센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험에 놓일 때마다 웨슬레 자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공포로 안절부절 했었지만 그들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고 마음의 안정과 마음의 참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그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7시가 되어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이 모여 있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주의 깊게 관찰해 보았지만 그들의 생활 속에 남달리 깊은 경건이 몸에 스며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겸손했습니다.

그들의 이와 같이 꾸준한 겸손의 미덕은 배에 탄 다른 손님들을 위한 천한 잡무를 솔선해서 무보수로 맡아 하는 것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들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라고는 조금도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 형제들의 집회에 직접 참석하고 나서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뻐기지도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고 악하게 대항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서워하는 마음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모라비안 형제들이 집회를 시작하려고 찬송을 부를 때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 위를 덮쳤습니다.

그 때 배의 제일 큰 돛이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물바다가 되고 물은 갑판위로 노도같이 밀려들었습니다.

깊은 흑암은 이미 배에 탄 사람들 우리 모두를 삼켜버릴 듯했습니다.

영국인들의 선실은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은 이때에도 조용히 찬송을 계속 부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 후에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 중에 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제님, 무섭지 않았습니까?'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죠'

'그러나 부인들이나 어린이들은 무서울 것이 아니겠어요?'

'아닙니다.

우리 형제들은 비록 연약한 아녀자라도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때 당시의 요한 웨슬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도저히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험이었습니다.

참으로 요한 웨슬레는 비로소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지식으로만 알던 위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한 성도들,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스스로 알고 확신하고 있는 무리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활과 심령의 자세는 자기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겸손했고 온유했고 그리스도인다운 것이었습니다.

화내는 일이 없고 억울해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침착하고 조용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참으로 그들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서운 풍랑 속에서 파선의 위험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미국의 죠오지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웨슬레는 미국 죠오지아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 모라비안 형제교회의 성도 중에 스팡겐 베르그 형제라고 하는 한 전도자가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을 하겠노라고 하며 요한 웨슬레에게 대답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 웨슬레 자신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형제여 내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먼저 두어 가지만 대답해 주도록 하세요.

형제의 마음속에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지요?

성령이 친히 형제의 영으로 더불어 형제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있는지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어라고 대답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그는 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분이 세상의 구주인 것을 압니다.'라고 짐짓 목사로서 위엄 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맞습니다.

그분이 세상의 구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 자신에게 당신 자신의 개인의 구주로서 당신 자신을 구원하신 것을 당신 자신이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죽으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인 줄을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신 스스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나는 이 때 커다란 혼란을 느끼며 '예'라고 매우 어정쩡하고 불안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말이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 말이 허공에 뜨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는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들의 믿음 가운데 존재하고 있던 그가 실제로 목격했던 그 평안을 찾기 전에는 그 자신의 마음에서 사실상 평안을 가질 수가 없었고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웨슬레는 그곳 죠오지아에서 2년 동안 선교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실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되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의 선교여행도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안을 구원하기 위해 나는 미국으로 왔습니다.

아, 그러나 누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믿지 않는 악한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자가 누구란 말인가!

내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없을 때만이 나는 자신이 있고 그 때만이 내게 장애물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이 나의 면전에 나타나기만 하면 내 생명에 곧 바로 풍파가 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정이 이러할 진대 내게  어디에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이 진실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한 구원의 확신도 없이 그저 ‘미지근한 신앙’만을 갖고 있었구나."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 신학과 졸업한 졸업생 선교사이었지만 엄격하게 종교적인 그의 “적당히 따뜻한 정도의 신앙”으로는 인디안 이교도들은 물론 영국 식민지 주민들조차도 감동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 왔을 그 무렵에 그는 거의 영국 국민 모두가 전날의 옥스퍼드 동창생이었던 죠지 위트필드의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위트필드는 극적인 거듭남의 경험 곧 중생의 경험을 하고 나서는 많은 청중들에게 그 위로부터 거듭나는 중생에 대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요한 웨슬레의 친 동생인 챨스 웨슬리가 병이 났었고 이를 계기로하여 요한 웨슬레는 다행히도 한 사람의 모라비안 형제교회 형제들 중에 한사람의 전도자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피터 볼레르' 형제라고 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챨스 웨슬레의 병때문에 요한 웨슬레가 그의 동생의 병상으로 급히 달려 가 보았을 때 그 곳에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인 피터 볼레르 형제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피터 볼레르 형제는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인 동생 찰스 웨슬레에게 그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달라고 목사인 요한 웨슬레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나중에 그의 일기에 이 일에 대하여 “그 때 피터 볼레르 형제가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내게 해 주었던 그의 대화를 충분할 정도로 듣게 되었습니다.”라고 써 놓고 있었습니다.


그와 진지하게  교제를 나눈 결과 자신에게 전혀 구원 얻은 믿음이 없음을 그 때 요한 웨슬레는 깨달았습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로소 처음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마침내 요한 웨슬레는 결국 목사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도 아닌 벌거벗은 한 죄인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교회 형제들을 만난 이후 그 자신 얼마나 간절히 추구해 왔던 것이었던가!

그러나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참 모습을 발견했을 뿐 요한 웨슬레는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하여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기가 죄인인 것은 깨달았으나 아직도 ‘피터 볼레르’ 형제로부터 전해들은 “믿음으로써 단번에 얻는 구원”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믿음의 상태에서는 강단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피터 볼레르 형제는 요한 웨슬레가 스스로 진리를 갖게 될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이야기하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강단을 과감하게 버리고 감옥소 전도에 나섰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레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인 6일에 나는 비로소 내게는 생소했던 복음인 구원 받는 믿음에 관한 이 새 교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 때까지도 내 심령은 이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이 전도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사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전도였습니다.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에 대한 복음을 내가 처음으로 증거한 사람은 사형 집행일을 앞둔 한 사람의 사형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희망이 있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부모의 무릎에서부터 들으며 자라왔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순간 즉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요한 웨슬레도 구원이 사람의 공로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사실까지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래도 여전히 구원이 믿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가르침을 받고 알아오고 믿어오던 것과는 너무나 판이하고도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 점진적으로는 믿을 기회는 없는 사형수 앞에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그 자신 아직은 내키지 않는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점과 관련해서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볼레르 전도자가 말한 사실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순식간에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음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육의 비참한 처지에서 의 가운데로 그리고 성령의 기쁨 가운데로 당장 어떻게 순식간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놀라움은 너무나 컸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실 하나 하나가 모두 순간적으로 구원 얻은 그것만을 기록하고 있고 그 외에 달리 구원 얻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후 요한 웨슬리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사형수에게 그가 비록 죄수라 할지라도 단순히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면 그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죄수는 “그리스도를 믿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제 나는 완전히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죄수는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다 없애 버리셨습니다.”라고 덧 붙여 말했습니다.


그 죄수는 구원 받지 않은 목사 요한 웨슬레 자신을 통해서 완전히 확신하였고 구원을 받았지만 가련한 요한 웨슬리는 아직도 계속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피터 볼레르 형제는 이러한 그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 그들 형제들의 간증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주일날에도 역시 나는 이 형제들의 살아있는 간증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간증을 듣고 난 후에 나의 완고한 고집은 다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간증을 하고 있는 그 형제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그들의 말을 직접 들은 다음에야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 모라비안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을 순식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과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공포에서 성결과 평안으로 그 즉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르게 하신 사실들을 증언했습니다.

나는 이 이상 더 진리의 복음을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내가 행할 수 있는 나의 부르짖음은 '내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새로 발견한 이 믿음을 자기의 교단 강단에서도 두려움 없이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직 그만한 체험을 얻지 못했지만 누구든지 믿는 순간에 구원이 이루어짐을 거리낌 없이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교회는 하나 둘씩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아무 교회도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 웨슬리 자신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습니다.


1738년 5월 20일 찰스 웨슬리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고 나서 스스로의 마음에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새벽 5시에 요한 웨슬리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펴서 읽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그리고 그 날 저녁 그는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친목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날밤 그 곳에서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순간, 즉 거듭남에 대한 경험을 맛보는 순간이 마침내 그에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날 밤은 그의 승리의 밤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 지는 그 때 얻은 구원 간증에 관한 다음의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알드즈게이트 가에서 저녁 집회가 있었습니다.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내키지 마음으로 나의 발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누눈가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간은 9시 15분 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마음에 감동이 옴을 느꼈고 이상 하게도 내 마음이 따뜻해 옴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 나의 구원에 대하여 오직 그리스도 그분 한분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내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도말하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리에게 이야기를 전해 해주기 위해 거의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동생의 방으로 뛰어 들어 가면서  “나는 이제는 믿게 되었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요한 형, 우리 함께 찬송을 부르자”라고 동생인 챨스 웨슬레가 제안을 했습니다.

요한이 제안에 동의했고 그 두 형제는 챨스가 바로 하루 전날 지은 새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는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중에 하나입니다.


“죄인들의 친구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내 방황하는 영혼 어디에서 시작할까!

내가 어떻게 천국을 바랄 수 있을까!

나 이제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노예인데

나 이제는 영원한 불길에서 집어 낸 검불인데

이제 내가 어떻게 이 놀라운 승리의 개가를 부를까

이제 내가 어떻게 이 위대한 구세주를  찬양할까?


이제 요한 웨슬레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믿어야 되겠다는 다짐(결신)을 하고나서,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 받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요한 웨슬레는 구원이 믿는 즉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시인 하였고  또 그가 이 사실을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까지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채로도 자신이 속해있던 기존 교단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고 또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채로 그 곳에서 배척까지 받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있는 요한 웨슬레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전적으로 믿을 때 마침내 거듭나게 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왔던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요한 웨슬레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경험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즉,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비록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고 하드라도, 또한 그가 비록 선교사로까지 헌신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심지어는 그자신이 구원 받는 믿음에 관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자신이 전파한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경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거듭난 경험을 하지 않은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요한 웨슬레가 모라비안 형제교회 성도인 피터 볼레르 형제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영으로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체험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열매 없는 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기독교계에 구원받지 않고 종교생활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혹시 구원 받기전의 요한 웨슬레와 같은 목사님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혹시 구원 받기전의 요한 웨슬레와 같은 선교사님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듭남을 분명하게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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