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
우동 한 그릇 본문
어제 모아탁구동호인들이 연습을 마치고
월례 점심식사 자리를 함께 했다.
‘친친’이라는 중화 요리집이었다.
좁은 공간 두어줄 되어 보이는 자리에 앉을 틈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탕수육과 짜장 우동 간짜장 ...
돌아오는 길에 ‘우동 한 그릇’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가 쓴 ‘우동 한 그릇’이다.
섣달 그믐날 밤 10시, 북해정이란 우동집.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출입문이 힘없이 열리며 한 여자가 여섯 살, 열 살 가량의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우동 1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주문을 받은 주인은 1인분 우동에 반 덩어리를 더해 삶았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맛있게 먹었다. 150엔을 내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고 나가는 그들에게, 주인 부부는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다음 해 같은 날에도 그들은 한 그릇의 우동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 다음해 섣달 그믐날 밤, 주인은 10시가 넘자 메뉴표를 바꾸어 200엔이 된 우동 가격을 150엔으로 되돌려 놓았다. “저- 우동 2인분인데 괜찮아요?”
신문 배달도 하고 저녁을 대신 차리기도 하며 도와준 아들들 덕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고로 인한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 우동집 부부의 인사를 소재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 입상한 큰 아들의 이야기! 글짓기 대회에 출품한 아들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 그릇 밖에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동집 아저씨 아줌마가 ‘고맙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해주신 그 목소리는 ‘지지 마라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면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고 싶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300엔을 내고 인사하며 나갔다.
다시 1년이 지나 북해정에 세 모자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십 여년이 지난 어느 해 섣달 그믐밤이었다.
그 집 주인의 동료들이 술이랑 안주를 들고 떠들썩하게 앉아 있는데 문이 열렸다.
외투를 든 정장 수트 차림의 두 청년과 화복 차림의 부인이 깊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정중히 말했다.
“저 - 우동 3인분입니다만 – 괜찮겠죠?”
당황해하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의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밤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그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은 되지 못했습니다만,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제 인생에서 최고의 일을 계획했습니다. 오늘 북해정을 찾아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난다.
시간과 일정에 쫒겨
가족 회식이라고 맘먹고 나가
이곳저곳을 물색하다 보면
가족 의견을 묻게 된다.
결국 중화요리 짜장집으로 향하곤 하였다.
가족 회식답게 푸짐한 요리를 생각하고 집을 나서지만
어린애들의 기호와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수식을 해도 ‘북해정 우동집’의 그림은 아니다.
섣달 그믐날 밤 10시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나갈 무렵
출입문이 힘없이 열리며 허름한 옷차림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머뭇거리며
세 식구에 우동1인분 주문하는 정서는 아니었다.
우리 삶이 어느 항구를 향하든
‘북해정 우동집’의 운명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인환의 거리 비좁은 길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비움과 나눔으로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