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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젼 회심(1850. 1. 6) 160주년
나는 어느 주일 아침 어떤 곳의 예배에 참석하러 가는 중에 눈 폭풍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었을 거라고 때때로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옆길로 내려갔고 어떤 작은 원시 감리 교회(Primitive Methodist Chapel)에 가게 되었다.
그 교회당에는 아마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보수적인 원시 감리교도들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크게 노래를 부르는지 사람들에게 두통을 일으킬 정도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상관 없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알기를 원했고, 그들이 만일 그것을 내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들이 내게 아무리 두통을 일으킨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날 아침 목사는 오지 않았다. 그는 눈에 갇혔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매우 마르게 생긴 한 사람이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왔는데, 그는 구두쟁이거나 아니면 양복쟁이, 아니면 그런 종류의 직업인이었다.
*요즘은 설교자들이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말 무식했다.
그는 그의 본문에 집착해야만 했던 단순한 이유는 그가 달리 말할 만한 다른 본문이 없었던 것이다.
그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44:22)
그는 그 단어들을 바르게 발음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본문에는 내게 섬광과 같은 희망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정말 아주 간단한 본문입니다. 본문은 ‘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보는 것은 그리 많은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을 일으키거나 손을 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보라’는 것입니다.
자, 누구든지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가장 무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볼 수는 있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능력을 위해 연간 수입이 많아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조차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분은 ‘나를 바라보아라. 라고 말합니다. ‘예!’ ”그는 완전한 남동부 잉글랜드 사투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자신 안에 편안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아닙니다, 지금 예수를 바라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본문은 ‘나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휼륭한 사람은 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처리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걸려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았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승천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난한 죄인들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그가 그 쯤 말하고는 한 십 여분쯤 더 끌고 나갔지만, 그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 때 그는 강단아래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곳에 않았을 것이고, 그는 내가 방문객인줄 알았다.
나에게 눈을 고정시키면서, 마치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이, 그는 “젊은 친구여, 당신은 매우 불행하게 보인다네.”라고 말했다.
그래, 난 정말 그랬다.
그러나 전에는 강단으로부터 말하는 나의 개인적인 모습에 대해 잘 소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 마음을 강타한 강풍이었다.
그는 계속했다.
“그리고 자네는 항상 불행할 것이야.
이 땅에서나 죽고 난 뒤에도 말이야.
만일 자네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러나 자네가 지금 바로 순종한다면, 이 순간 자네는 구원받을 것이네.”
그때 그는 그의 손을 들어서 원시 감리교도들만 할 수 있는 말로 소리쳤다.
“젊은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바라보라! 보라! 보라!
자네는 바라보고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네.”
나는 그 순간 구원의 길을 보았다.
나는 그가 말한 것 중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고, 나는 그의 말에 많은 주목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한 생각에 깊이 사로잡혔었다.
구리뱀이 들렸을 때 사람들은 단지 쳐다보았고 그리고 치유되었을 때처럼, 내가 바로 그랬다.
나는 수많은 일을 행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보라!”라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인 말이었던가?
오! 나는 나의 눈들이 거의 튀어 나갈 뻔할 때까지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구름이 사라졌고, 어둠은 걷어졌으며, 그 순간 나는 태양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일어나 가장 정열적으로 그러한 사실들과 예수님의 그 귀중한 보혈과 그 분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 어떤 사람은 전에 이것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예, 틀림없이 그것이었고 그것은 지혜롭게 정돈되었고 지금 나는 말할 수 있다.
“당신의 흘러내리는 상처의 샘을
믿음으로 본 이후로,
구속하시는 사랑은 나의 테마가 되었네,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에게 가기 전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고 내 영혼은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지금보다 더 비열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이상하고, 더 지치고, 더 염려하고, 더 머리가 아팠었다.
이 고백에서 내가 좀 특이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랬고 그 고백이 사실인 것을 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예수께 맡긴 그 사랑스런 시간 이후로 나는 확실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했다.
이전의 청년초기에 있음직한 모든 유쾌함이나 소년시절에 상상되는 모든 유용함과 즐거움들이
나에게는 영적인 공허요 번뇌였다.
내가 구주를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하는 발을 꽉 붙잡았던 그 행복한 날은 결코 잊어버릴 수 는 날이었다.
불확실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들은 바도 없었던 아이였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귀중한 본문은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했다.
나는 그날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나는 뛰어다닐 수 있었고, 춤을 출수도 있었다.
비록 열광적이지만 그 시간의 내 영의 기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그 때 이후 많은 날들의 크리스천 경험이 지나갔지만 그 첫날에 가졌던 불꽃 튀는 기쁨의 충만한 흥분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나는 앉았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함께 참석했던 감리교도 형제들의 세련되지 못한 모습으로.
“나는 용서받았다! 나는 용서받았다! 기념할 만한 은혜의 순간! 한 죄인이 보혈로 구원받았다!”라고 외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 영을 묶고 있던 사슬이 산산조각 난 것을 보았고, 내가 해방된 영혼으로 하늘의 상속자이고,
더러운 진흙과 공포의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아 그리스도안에 용납된 용서받은 자로서,
내 발이 바위 위에 서 있고 나의 앞길이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춤을 출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존 번연이 ‘그의 회심에 관한 모든 것을 경작된 땅위에 있는 까마귀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 토로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충만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의 해방의 날과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챠드 크닐이 “그 날의 그 시간에 하늘의 하프가 모두 그 소리를 낸 것은
리챠드 크닐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대로, 나에게도 그랬다.
* 하늘에서 자비의 시계가 나의 해방의 시간과 순간을 울렸는데 그 때가 온 것이다.
내가 교회당에 들어간 10시 30분과 집에 돌아온 12시 30분 사이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어둠에서 경이로운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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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 목사가 회심한 날은 1850년 1월 6일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1856년 1월 6일 주일날 아침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사 45:22의 본문으로 설교할 때,
6년 전 바로 이날, 바로 이 시각에 바로 이 본문에 의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앙망하도록 인도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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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예수를 바라봄으로서
나는 절망에서 해방되었고, 그와 같은 아음의 기쁜 상태로 인도되었다.
그들이 집에서 나를 보았을 때,
“무언인가 굉장한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구나.”라고 말했고, 나는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오! 집안사람 모두가 장남이 구세주를 발견했고, 스스로 용서받았음을 알았다는 것을 들을 때 집안에서는 그날 기쁨이 있었다.
- 땅 위의 모든 즐거움을 그 축복과 비교할 때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공허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 처지 그대로 예수를 바라보았고 그 안에서 나의 구세주를 발견했다.
이 같이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이 선포되었다.
전에는 나같이 곤고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순간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이루어졌고, 계속해서 이루어진 상태로 가는 것이다.
나는 바라보았고 살았으며, 그리고 나의 죄가 위대한 대속위에 형벌을 받아 영원히 제거되었으므로 자유의 기쁨 가운데 뛰었다.
그 분이 그 십자가 위에 피를 흘렸으며 나는 그 분을 바라보았다.
그 분은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나의 영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나는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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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 선생의 영원히 사랑하는 기억으로
Bexhill-on-Sea에 세워진 the School-Chapel의 기반이 되는 돌들 중 하나 위에,
통행인들이 그의 회심을 축복한 성경 구절을 읽음으로
구원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으로
다음과 같이 조각되어 있다.-
스펄젼 선생께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발견하셨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았고.
그분은 나를 내려다 보셨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 C. H. S.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고 나 이외는 아무도 없음이라.”- 사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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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영안에 있는 어떤 동요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내 영혼을 여울도 없고 조용하고 편안한 강의 표면같이 만들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웠다.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바로 그 날에
구름이 꼈는지 햇살이 났는지는 내게 상관없다.
그분을 발견했던 것으로 나는 충분했다.
그분은 나의 구주였고 나의 전부였다.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던 그 한날로서 5년 동안의 죄 확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밤마다 나를 무섭게 했던 공포와 낮마다 나를 경고했던 끔찍스러움에 대해 하나님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나를 행복하게 했다.
지금 만일 내 영혼을 짓누르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온갖 땅의 것에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고뇌와 고통 때문에 짐승처럼 바닥을 기도록 하는 그런 짐이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내가 고통 받았던 그런 고통을 다시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 이외에는 내가 알고 있었던 고뇌보다 더한 것을 결코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에 속하게 하는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믿음 안에서의 그 편안함과 기쁨과 평화는, 지나간 날의 나의 고통과 고뇌를 회상하면 이제 갑절로 감미롭고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 되었다.
음울한 겨울 같은 어두운 날들을 여름날과 같은 상쾌하고 감미롭게 하신 당신,오, 하나님을 송축하나이다!
모든 그림자로 두려움에 가득 차거나 내가 만난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땅위를 걸어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은 내 죄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영은 더 이상 죄책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 순전해졌고 거룩해졌다.
하나님의 불쾌함이 더 이상 내게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의 아버지는 웃으시고 나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본다.
- 그분의 두 눈은 사랑의 바라봄이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감미로움의 가득함이다.
나는 용서받았고, 나는 용서받았고, 나는 용서받았다!
내가 그것을 회상해 보면, 콜체스터에 있는 그 원시 감리교회에서 설교한 그 본문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어떻게 나를 축복했는지의 그 이유를 하나 생각할 수 있다.
때마침 나는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고조되었던 것이다.
구세주를 찾고 있을 때, 한 청년으로서 나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정열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은혜로운 책들을 읽을 기회를 가져서 주를 찾고자 했다.
나는 나의 의문된 생각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탄원했던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텍스트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 아닌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라고 그리스도는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다.
내가 영생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가?
나는 사도 바울이 성령에 의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가진다.” 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만일 나의 신뢰가 예수에게만 고정되어 있고
내가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정말 굉장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때 그 영혼이 그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나의 구주고 받아들이고 구원 받았다.
그리고 왜 그분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는가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겸손히 고백하자면, 나는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구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만일 여러 명의 다른 구세주가 있었더라면, 그 엄격한 율법적 행위가 나를 몰아 그들을 생각할 수 없는 조건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을 것이다.
- 나는 이 한분에게 끌려갔다.
나는 신적인 구주를 원했고,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나 대신 저주받았던 분을 원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기에 죽음을 당하신 분을 원했다.
나는 다시 사신 분을 원했는데, 그분의 생명에 의해 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 안에서 내 앞에 서시고 내 마음에 계시된 바로 그 구세주를 원했다.
나는 그분을 소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루더포드가 애버딘의 지하 감옥에서 언젠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말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오 나의 주여, 나와 당신 사이에 만일 어떤 넓은 지옥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을 걸어서 통과하는 방법 외에 당신께 이르지 못한다면, 나는 두 번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당신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곳을 통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외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 나는 얼마나 그 분을 사랑했는가!
그 분의 사랑 외에 모든 사랑들을 넘어선 것 바로 내가 그 때 그분에게 느꼈던 사랑이었다.
만일 내가 그 분을 만났던 그 장소의 문 옆에 불타오르는 장작더미가 있었더라면, 나는 족쇄 이 그 위에 섰을 것이며, 기쁨으로 나의 몸과 피와 뼈가 재가 되도록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분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이 만일 그 때 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을 위해 나 자신이 거지가 되는 것은 놀랍게도 내가 부유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 분이 그때 모든 그분의 적들 가운데서 설교하라고 명령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모든 당신의 무리가운데 내가 양육하기
꺼려할 양이 한 마리도 없나이다
적들의 면전에서 변호하는 당신의 이유에 대해
내가 걱정할 적은 하나도 없나이다.”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는가?
여기서 나는 감히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나는 그 분이 그렇게 하신 것을 안다.
그분의 말씀은 진실이고,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나의 증거는 내가 설교하거나, 혹은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한 사실에 있지 않다.
모든 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오셨다는 것에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죄인이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때 그 분은 나를 구원하러 오셨고,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늘 이 축복스런 사실을 즐기면서 사는데, 내가 그 진리를 의심했던 이후로 쭉 그랬다.
왜냐하면 나는 그 분 자신의 말씀으로 나의 믿음을 붙잡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에게는 참 놀라운 일이다.
그날에 대해서조차 나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가장 경이로운 것이다.
나 자신이 스스로 나는 가치 없는 몸이며, 부패덩어리이며, 죄로 가득 찼고, 그 분의 전능한 사랑에 멀리 떨어진 자로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충만한 확신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내가 마치 완전히 의롭게 된 것 같이 대우받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공유하는 자인 것을 안다.
비록 본성으로는 가장 죄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거해야하지만 말이다.
자격 없는 내가 마치 자격 있는 자처럼 대우받는 것이다.
비록 전에는 불경건한 자였지만,
내가 마치 경건한 자처럼 많은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루터와 칼빈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총체와 실체는 바로 사람을 대신해서 서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말에 놓여있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복음을 이해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의 자격이 된다.
내가 정죄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내 대신 형벌을 받았기에
죄에 대해 두 번씩 그 선고를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완전한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나는 매일 죄를 짓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의 의는 하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리스도는 완벽한 의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분은 “여기, 가난한 죄인들아, 내 옷을 집어 걸쳐라.
너희는 마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나는 마치 죄인처럼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나는 죄인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것이고 너희는 행하지 않았지만 내가 행한 공적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매일 가는 것이 용이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왔기 때문이다. “너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악마는 말한다.
그래, 내가 성도가 아니라면 나는 죄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 세상에 오셨다.
죽든지 살든지 나는 그분에게로 간다.
다른 희망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분을 바라봄으로서 나는 그분의 은총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영감을 준 모든 믿음을 받았다.
처음 내 영혼을 이끈 - “나를 앙망하라,”- 라는 말씀은 여전히 나의 귓전에 클라디언 악기 음으로 울린다.
한번 회심을 발견한 후 나는 계속해서 새로움과 새롭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보았던 것, 내 자신의 귀로 들었고, 또 내 자신의 마음으로 느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를 말하기를 원한다.
첫재,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다.
그 분은 나에게 하나님이신데, 만일 그분이 이 밖의 모든 세상에 대해 사람이셨다 하더라도,
그 분은 단지 한 분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나를 위해 하셨다.
그분은 나의 고집 센 의지를 꺾으셨고, 굳어있는 마음을 녹이셨고,
강철의 쇠사슬을 부수셨고, 놋쇠 문을 열었으며, 그리고 철 빗장을 제거하셨다.
그 분은 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고, 절망을 즐거움으로 바꾸셨다.
그 분은 포로된 나를 포로로 잡으셔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내 마음이 즐겁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고 유일한 독생자였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분의 거룩한 이름에 복 있을지어다!
“오, 내가 지금 그분을 경배할 수 있네,
위에 있는 천국의 무리들처럼,
그들은 영원히 그분 앞에 고개 숙이고,
쉬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노래하네!
행복한 합창단들이여!
언제 내가 당신들의 합창에 함께 하려나?”
또 그 분은 은혜가 충만한 분이신 것을 증거하고 싶다.
아, 그 분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분의 영광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죄가 가득 차서 넘쳐흘렀다.
나는 이미 정죄 받았던 것은 내가 그 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오기를 원치 않았을 때 그 분은 나를 끌었고, 비록 내가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분은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결국 내가 그 분의 자비의 자리에 와서 선고받은 범죄자처럼 떨고 있는데, 그분은 “그 많은 너의 죄들이 다 용서받았다.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분을 경멸하고 있지만 나는 그 분이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 분은 진리가 충만한 분인 것을 증거하고 싶다.
그 분의 약속들은 진리였다.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 분을 의심했는데, 그것에 대해 부끄러웠다.
그 분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는데 이것에 대해 나는 기뻐함이 틀림없다.
그 분의 약속들은 예요 아멘이었다.
나는 비록 이 증거를 개인적으로 이와 같이 힘 있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이라도 나와 같은 그런 주인을 모신 사람은 없다고 증거하고 싶다.
어떤 형제라도 그 분이 나하고 관계하는 것 같은 그러한 혈육은 없다.
어떤 아내라도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에 관계하는 것 같은 그런 남편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더 나은 구세주를 얻은 죄인은 없다.
어떤 병사도 더 나은 중대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슬퍼하는 자라도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에 한 것 같은 그런 위로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 분 이외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
삶에서 그 분은 나의 생명이다.
죽음에서 그분은 그 죽음의 죽음이다.
가난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부이다.
아픔에서 그는 나의 침상이 되신다.
어둠에서 그 분은 나의 별이다.
밝음에서 그 분은 나의 태양이다.
믿음으로 나는 복된 하나님의 아들이 그 분 자신의 심장의 피로 내 영혼을 속량하신 것을
이해한다.
감미로운 경험으로 그 분은 어두운 절망의 늪에서 나를 일으키시고, 나를 바위에서 서게 하셨음을 안다.
그 분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만족의 뿌리이다.
그 분은 나의 모든 허물을 지워버리셨다.
그 분은 당신의 귀중한 보혈로 나를 깨끗케 하셨다.
그 분은 당신의 완전한 의로 나를 보호하셨다.
그 분은 당신 자신의 덕들로 나를 옷 입히셨다.
그 분은 내가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유혹과 덫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분은 나를 위해 이미 시들지 않는 행복의 천국에 한 집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의 면류관을 이미 준비하셨다.
그 때 나에게는 여러 날, 혹은 여러 해 동안 이 땅에서 인생의 체류가 단지 순간이 되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가진 죽음의 방법도 아니다.
적군들이 나를 순교의 죽음으로 선고하거나, 혹은 내가 ‘곧 이 생을 떠날 것이다’라고 의사가 말했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불과 몇 번만 태양이 돌아서 온다면
나는 아름다운 가나안의 해안에 다다를 것이다.”
이 땅에서 나의 짧은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나를 위해 종들의 종이 되신 그분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만일 내가 개처럼 죽게 되고 불멸에 관한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하는 사정이라면, 그리고 내가 만일 어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면, 온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을 섬기게 해 달라.
나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그분의 발걸음과 동행하게 해 달라. 만일 그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 해도 나는 어떤 왕이나 황제가 되기보다는,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할 것이며, 가장 겸손한 기독교 목사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더 많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계의 모든 노래에서나 햇빛 나고 밝은 날들에서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쁨에서 보다, 그 분의 얼굴에서 보는 한 섬광에서 더 많은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까지 계셨고, 그리고 끝까지 계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이 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또 계속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에는, 땅위의 사람들에게 너무 무거워서 한 사람으로서는 지고갈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열매들이 너무 풍요하게 발견되고 있기에 천사들의 입술조차 더 달콤한 포도주로도 결코 감미롭게 해줄 수 없었다.
그 곳에서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은 너무 아름다워서, 낙원의 신성한 고양이들이나 즙이 많은 포도주들조차 주님이 베푸신 땅 위의 연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미로운 만족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예수께 주었던 것을 보아왔지만, 그 분에 대해 실망하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신 것보다 모자라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처음 내가 그 분을 바라보았을 때,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정죄로부터 자유 했는데, 내가 들어왔던 모든 설교자들이 진리를 반쯤 설교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구주와 주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반쯤 말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너그러운가!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얼마나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인가!
나에게는 그들이 그 분을 거의 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분의 형상을 할 수 있는 한 의심 없이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그 분의 얼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단순한 윤곽일 뿐이었다.
그 분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번 슬퍼한 일은, 내 자신이 그 분을 알았을 때에도 나의 주를 설교할 수 없는 것과, 내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그분의 은총에 무한함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그 분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더 낫게 말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