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향
도루코 면도기 본문
눈이 또랑또랑한
어리디 어린 누나의 딸
그 아이가 자라
동심 한 복판에 각인 된 부심(父心)을
한낱 도루코 면도기 하나로
어린 시절 일찍 떠나버린
그윽한 부감(父感)을 체감하고
그 부성의 목소리까지 들으려하니
비록 고인인들 어찌 영면하지 아니 하겠는가!
어제는 그 애가
갓 출간한 시집을 보내왔다.
도루코 면도기
정 란 희
오랫동안 투병 중이던 아버지 병문안 온
흥복약국 주인은
병이 다 나아서 다행이라 했다
거울 앞에서 면도 하던 아버지 손끝은 가늘게 떨렸고
그 모습 지켜보던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밤마다
우리들 잠든 얼굴 들여다보며 내가 살아야 하는데
속삭이던 간절한 소망 들어 주신 게야
긴 둑길을 따라 함께 심었던 코스모스
달빛이 너무 고와 몸을 흔들고
강아지 메리와 복실이도
윗동 아랫동 온 동네가 시끄럽게 짖어댔다
며칠 후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꽃상여를 타고 가셨고
떠난 자리엔 도루코 면도기만 남아 있었다
가끔 그날처럼 거울 앞에서
아버지 하신 것처럼 면도기를 들고 있으면
그만 다칠라 그리운 목소리 들린다
정란희
-한국문협 경기도부지회장
-한국작가협회 사무국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
-기픈시 동인
-한국문인협회
시집 「분수의 노래」 「작은 걱정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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