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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이사(移徙) 이야기

綠香 2013. 12. 20. 09:26

 

목포 원도심에 살다가

정년 후 백수가 되어

새 보금자리 찾아 둥지를 튼 곳이 남악 오룡 기슭의 아파트다.

으레 이사를 하다보면

세간붙이 손때 묻은 가재들을 챙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사 목록 중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 동안 내 분신처럼 행적의 그림자가 되어온 책들이 화제의 주인공이다.

이삿짐들을 챙기다 보니 무게와 분량이 보통이 아니고

그보다 산뜻한 새집에 둘만한 공간이 없다는 옹색한 명분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니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향토장학금이라고 부모님이 보내주신 하숙비는 넉넉 할리 없었다.

그 당시 전국 셋 중의 하나인

국립사범대학을 선택한 것도 바로 어려운 농촌 형편이었리라.

먼저 하숙비를 지불하고 나면

몇 푼 안 된 용돈의 갈등을 아예 없애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었다.

40여 년 전 지금도 추억 속에 아련한

공주 중동에 자리한 세종서점에 들려

사고 싶은 책을 골라 사버리는 일이었다.

책 사는 일로 호주머니를 짐짓 비워버리면

용돈일로 갈등을 겪을 일은 없게 되었었다.

책을 살 때 마다 마지막 책갈피에

모년 모월 모일의 출생의 비밀을 낱낱이 기록하고 사인까지 해 됐다.

그러한 출생의 비밀로 태어난 책들 -

나의 땀과 의미가 얼룩진 그 애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보릿고개를 넘어

40여년 동안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애들을 멀리 보냈다.

이사할 때 마다 무거운 짐이요

10분 지근거리에 전남도립도서관이 늘 기다리고 있다는 속셈이었다.

새 보금자리 이곳으로 이사 오던 날

아무 말 없이 나의 곁을 떠나가야만 했던

그 애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그러하지 않고는 아니 되었단 말인가!

그 애들은 책갈피에 담긴 진수를 말없이 전해주고

세월 따라 낡고 까칠한 주름살진 허름한 모습으로

나의 곁을 떠나갔다.

아니 내가 버린 분신들이었다.

오늘 따라 떠나간 나의 분신들이

마치 백치 아다다가 뿌린 지전들처럼

겨울 창밖에 편편히 날리는 눈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정녕 책 속의 벌과 나비들은

그러한 나의 모습과

부메랑 되어 돌아오는 그 애들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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