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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내 고향 칠봉리

綠香 2013. 12. 27. 07:53

[靑松沈][七峯里]의 뿌리

(枕溪沈公埰鎭遺蹟碑에서 拔萃)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의 내력(內力)과 조상(祖上)의 뿌리를 확실히 모르면서 세월을 보내는 수가 많다. 더욱이 이러한 내림이 후대(後代)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다면 앞선 선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 상고(詳考)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정리하고 전하여 후손에 알게 함은 애향(愛鄕)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리운 고향!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조상님의 얼이 담겨 있고 선영(先塋)이 모시어 있고 부모형제께서 살고 계신고 어릴 적 꿈을 키워준 고향. 옛글에 월()나라 새는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만 길들이고 호마(胡馬)는 북쪽 하늘을 향하여 운다하였습니다. 금수(禽獸)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고향(故鄕)을 잊겠습니까? 천리(千里) 타향(他鄕) 봉고인(逢故人)이란 말이 새삼 실감이 납니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우리들의 고향 칠봉리(七峰里) - 옥과현에서 1908년 무신년(戊申年)에 곡성군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인접지역으로 담양군 화순군 승주군 구례군과 전라북도의 남원군 순창군에 인접해 있고 광주까지 팔십리, 곡성읍이 사십리 옥과면이 십리 담양읍이 육십리 남원시가 팔십리 순창읍이 사십리이며 청명한 날씨에 산()에 오르면 멀리 지리산(智異山) 조계산(曺溪山) 무등(無等)산이 바라보이며 가까이로는 동()으로 초악산(鷦岳山) 동남방(東南方)에 통명산(通名山) 남쪽에 차알봉(遮日峰) 서북방(西北方)으로 설산(雪山) 북쪽으로 장군봉(將軍峰)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남서(南西)쪽으로 매봉의 줄기에서 뻗어 나와 故鄕 七峰里 뒤에 이르러 일곱 봉우리를 이루었으니 그런 연유(緣由)로 동명(洞名)도 칠()()()라 작명하게된 것이다. 통명산 계곡으로부터 발원한 섬진강(蟾津江) 원류인 물이 유유히 흘러 한해(旱害) 없는 농경을 하여 봉제기(奉祭紀) 접빈객의 미풍양속을 오늘날까지 승계하고 있다. 남해고속도로가 마을 입구를 지나고 그 앞으로 지방도가 젓가락처럼 나란히 뻗어 있고 사시사철 맑은 명경수(明鏡水)가 흐르고 있어 살기 좋은 보옥(寶玉)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마을 입구 큰 소나무 서 있던 곳의 큰 바위(고속도로 공사로 거의 묻힌 상태)와 대환정(大還亭) 아래 마당바위에 음각(陰刻)된 궁계동천(弓溪東川?)도 그런 연유로 어느 선대(先代)의 뜻이 담겨진 것이 아니겠는가? 조상(祖上)의 얼이 서린 고향(故鄕)을 세상살이에 잊고 지낸다거나 공장이 들어서 汚染 根源이 된다고 하면 이는 子孫된 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칠봉리(七峰里)에 새 터전을 잡으신 칠대조(七大祖) 할아버지 침계(枕溪)공 채진(埰鎭)의 일대기와 大環亭을 건립케 된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西紀 1738(단기(檀紀)4071) 이조 21대왕 영조(英祖)대왕 14년 무오(戊午)년에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大明里에서 아버지 증통훈대부장락원정사익(贈通訓大夫掌樂院正師益)과 어머님 숙부인(淑夫人)인 남양(南陽) 홍씨(洪氏) 사이의 32으로 태어나시니 성()은 심()이요 명()은 채진(埰鎭)이며 자()는 계선(啓先)이요 호()는 침계(枕溪)이시다.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문림랑(文林郞) 위위사승(衛尉寺丞) 홍부(洪孚)인데 17代孫으로 三王后 四駙馬十三政丞을 배출한 명문의 後孫이다. 四世祖 諱德符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政丞이며 七世祖 諱( )京畿道 觀察使 集賢殿 大提學으로 世祖王位에 오르자 스스로 忘世라하고 節義를 지켰으며 端宗朝 名臣이라고 칭송하고 輔國崇祿大夫領敦寧贈職하였다. 八世祖 諱 安智海州牧使이고 九世祖 諱 淳副司敦寧府都正이며 玉果 濕霜村에 처음으로 터를 잡으셨다. 2 으로 태어나신 공께서는 칠봉리(七峰里)에 새터를 잡으셨고 3되시는 항진(恒鎭)께서는 백운동(白雲()에 새 터전을 잡으셨다. 약관시(弱冠時)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善世里)의 순흥인(順興人) 안무(安珷)의 따님을 맞아 영조백년(百年) 가약(佳約)을 맺었다. ()27세에 장자 지영(志永)을 낳으셨고 30세에 차남 홍교(永橋) 두영(斗永)을 낳으셨고 ()32歲 西紀 1769년에 영조 45년 을축(乙丑)년에 곡성군 겸면 칠봉리(七峰里)에 새터를 마련하여 분가하셨으니 이 해가 지금의 칠봉리(七峰里) 터를 잡은 원년(元年)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2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간 셈이다. 지금의 칠봉리(七峰里) 3452번지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집터인 것이다. 그 뒤에 安氏 할머님께서 천변으로 세탁물을 이고 빨래를 하면서 왕래 길에 보니 칠봉리(七峰里) 269번지의 터가 눈이 와도 제일 먼저 녹으며 따뜻한 관계로 다시 집을 옮겨 계속 종가 댁으로 내려 왔으나 고속도로 개통시 헐리었으니 哀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칠봉 효문동 신동을 총합하여 1914년 칠봉리(七峰里)로 개칭케 되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대환정(大還亭) 건립 년도를 고증할 자료가 없어 확실한 년대를 알 수 없으나 심계공(沈溪公) 할아버지 54세시 두영(斗永) 할아버지 25세로 가산해 보면 서기 1791(단기 4124) 정조 15년 신해년의 전후로 추측할 따름이다. 그 당시 교통이 불편하였고 인부도 귀한 악조건에서 대환정(大還亭)을 건립하였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 후손들은 할아버님의 큰 뜻을 새기면서 영구토록 보전에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처음 대환정(大還亭)에 들어선 터는 명실 공이 吉地였음을 느끼게 한다. 지금의 대환정(大還亭)이 천연정관이 우아하고 풍치가 뛰어났으니 일류명사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아니 하였다. 여기 대환정(大還亭)에서 다섯 아들을 가르치면서 친한 朋友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詩文을 짓고 읊으며 六藝를 즐기셨다. 대환정(大還亭) 천연정(天淵亭)이 자리잡은 일명 서당산(書堂山)의 면적이 칠봉리(七峰里) 임야(林野) 78번지 一町三半八毛이다. 서기 1972년에 남해고속도로관통하게 되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이 자리가 헐리게 되어 지금의 대환정(大還亭)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애석(哀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97223일 입주(立柱) 상량(上樑)을 다시 새겨 보전하게되었다. 대환정(大還亭)이 건립되어 대대(代代)로 자손들은 서당으로 사용하면서 글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시()를 짓고 읊으며 면면(綿綿)히 승계(承繼)해 왔으며 지금도 老人堂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後孫의 교화에 힘쓰고 있으니 우리 마을의 문화의 전당의 역할을 해 온 셈이다. 심계공은 순흥(順興) 안씨(安氏)와의 사이에 락규(樂圭) 락임(樂任) 락휴(樂休) 락세(樂世) 락호(樂好)를 두셨으며 차남 두영(斗永)은 자()七之이며 進仕壯元하였으며 慶州 鄭氏와의 사이에 락중( 樂中) 락서(樂書) 락구(樂龜) 락통(樂通)을 두었으며 3(三男) 우영(宇永)은 전주(全州)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락요(樂堯) 락순(樂舜) 락현(樂玄)을 두었고 4(四男) 근영(近永)은 계자(系子) 락호(樂好)를 두었으며 5(五男) 주영(周永)은 담양 전씨 사이에 계자(系子) 락휴(樂休)를 두었다 公께서는 천수(天壽)를 누리시다가 서기 1808년 순조 8戊辰1025終命하셨으니 享年 71이시다. 墓所揷亭 先山 고역동(古驛洞) 月座內外 合封하였으며 時享日陰曆 101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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