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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훔쳐 보는 연서(戀書지! 連書!)|

綠香 2013. 9. 17. 11:04

 

 

  연인도 아니면서 연인처럼 쓴 편지이려나!

수월히 헤아리기 힘든 이해인수녀님과 법정스님의 연서(戀書지! 連書!)의 글을 훔쳐보고 싶은 충동으로 감히 속량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이해인 수녀님의 맑은 편지]

법정 스님께 -

스님,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 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 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 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이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 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 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 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 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 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테니까요.


[법정 스님의 밝은편지]

이해인 수녀님께 -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 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 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현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 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 뜰에 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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